아마 초등학교 저학년쯤
어쩌면 초등학교 들어가기도 전이었던 때의 나는,
'나'라는 사람이 나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 그렇게 이상할 수가 없었다
그건 일기를 쓰면서부터 시작됐던 것 같다
책상 위 오른쪽에 놓인 지구본 아래에서 노트를 펼쳐두고
'나는'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써내려가던 어느날 문득 의문이 들었다
다른 나라의 어떤 아이도, 일기를 쓸 때 '나는'이라고 쓸까?
그럼 금발머리의 파란눈도 '나'고, 까만 얼굴의 아이도 '나'일 수 있다고?
멀리 갈 것도 없이, 내 친구는 친구 자신을 '나'라고 생각하겠지?
나는 나 하나뿐인 것이 아닌가?
많이 봐줘서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 같은 시각에 태어났으면
'나'로 인정해줄 수도 있는데, 그도 아닌 사람들이 '나'라고?
그게 그때의 내겐 굉장히 큰 충격이었다
작은 손으로 꽉 쥐었던 연필을 손에서 탁, 놓아버릴만큼.
엄마한테도, 아빠한테도 묻지 않고 무언가를 혼자 깨달았던 첫 기억.
그렇게 우스웠던 기억은 매일매일 런던책을 보고 있는 요즘,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고, 새로운 장소를 맞닥뜨릴때마다
익숙한 바람을 코끝으로 맡는 나를 상상하는 때, 불현듯 찾아왔다
다른 '나'도 있다는 것,
그러니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각자의 '자아'가 있고,
각자의 세계를 만들며 살아간다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인정하며
이십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차곡차곡 돌아볼 시간을 쌓고 있는 나는 이제,
내가 거쳐 온 어딘가에 또다른 '나'를 두는 상상을 하게 됐다
그러니까,
비록 나는 서울의 서점 한구석에 앉아 여행책을 들춰보고 있지만
또 다른 나는 내가 지금 보고 있는 모든 것들을 맘껏 누리는 즐거운 상상을 하는거다
물론, 책장을 덮는 순간 마음이 더 공허해질 수 있다는 위험이 있다는게 문제지만,
이건 꽤나 쓸만하고 재밌는 취미거리라는 걸, 요즘 깨닫고 있다
나에게, 런던을 녹여내고 있는 나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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